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존 올드리지 (문단 편집) === [[리버풀 FC]] ===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6f33a1e44eb04c71065881f5206c43dd.jpg]] [youtube(OjFl61bEyzI)] 이무렵, 리버풀은 [[이안 러쉬]]가 1986-87시즌 중반기에 유벤투스로 이적한 후 그의 빈자리를 대체할 선수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이에 리버풀은 1987년 1월 27일 7만 5천 파운드의 이적료를 지불하고 올드리지를 전격 영입했다. 올드리지는 1987년 2월 21일에 아스톤 빌라를 상대로 데뷔전을 치렀고 2월 28일 사우스햄튼을 상대로 데뷔골을 기록해 팀의 1:0 승리에 공헌했다. 이후 알드리지는 선수 겸 감독으로서 리버풀 최고의 레전드로 추앙받고 있던 [[케니 달글리시]]와 훌륭한 파트너십을 맺고 리버풀의 승승장구에 한몫을 단단히 했다. 당시 리버풀은 그와 달글리시 외에도 [[존 반스]], [[피터 비어슬리]] 같은 레전드급 선수들이 대거 포진해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삼아 1987-88 시즌 개막 이래 29경기 연속 무패 행진을 기록하며 1988년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올드리지는 컵대회에서도 훌륭한 활약을 선보였다. 그는 노팅엄 포레스트와의 FA컵 4강전에서 2골을 기록하며 팀을 결승전으로 진출시켰다. 그러나 FA컵 결승전에서 페널티킥을 얻어냈지만 윔블던 골키퍼 [[데이브 비산트]]가 올드리지가 왼쪽으로 찰 것을 예측하고 이를 막아내고 말았다. 결국 리버풀은 결승전에서 패해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다음 시즌인 1988-89 시즌은 그에게 있어 파란만장한 시기였다. 당시 이안 러쉬가 이탈리아에서 적응에 실패하자, 리버풀은 그를 전격 복귀시켰다. 이렇게 되자 올드리지는 한순간에 주전 자리에서 밀려날 위기에 직면했다. 하지만 케니 달글리시 선수 겸 감독은 경기 스타일이 비슷해서 투톱으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을 주전 투톱으로 삼기로 결정했다. 이 도박은 올드리지에겐 대성공으로 작용했다. 그는 지난 시즌보다 더욱 향상된 성적을 기록하며 자신이 명실상부한 리버풀의 핵심 공격수임을 입증했다. 반면 러쉬는 올드리지와 비슷한 경기 스타일로 인해 활동반경이 겹치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결국 올드리지에게 밀려나고 말았다. 올드리지는 리그에서만 22골을 기록했고 FA컵에서 6골, 리그컵에서 2골, 커뮤니티 실드에서 2골을 기록해 전체 대회에서 47경기 31골을 기록하는 무시무시한 활약을 선보였다. 그런데 1989년 4월 15일, 리버풀은 힐스버러 스타디움에서 노팅엄 포레스트와 FA컵 경기를 치루던 와중에 [[힐스버러 참사]]를 목도하고 말았다. 올드리지는 이 엄청난 비극에 큰 충격을 받았고 모든 장례식에 참석하면서 개인적으로 축구에 대해 회의를 품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아예 FA컵 경기에 나오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지만 팀동료와 달글리쉬 감독의 설득에 마음을 돌려 FA컵 재경기에 출전해 리버풀의 3:1 승리에 공헌했다. 그리고 FA컵 결승전 에버튼과의 경기에서는 첫 골을 기록하였고 뒤이어 러시가 2골을 기록해 3:2 승리를 기록해 FA컵 우승을 달성했다. 이로서 리버풀은 힐스버러 참사로 세상을 떠난 팬들의 넋을 우승으로 달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다음 시즌, 달글리쉬는 4-4-2 포메이션을 도입하고 폼이 완전히 돌아온 러시와 브래드슬리를 주전 투톱으로 삼고 올드리지를 벤치에 앉혔다. 이에 올드리지는 이적을 결심하고 9월 초순 레알 소시에다드로 전격 이적했다. 그는 리버풀에서 2년간 104경기 63골을 기록했는데 그 중 50골은 리그에서 기록한 것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